형사사건에서 ‘성인지 감수성’을 처음 언급한 대법원 판례가 5년간 하급심 판결에서 총 3697회...
형사사건에서 ‘성인지 감수성’을 처음 언급한 대법원 판례가 5년간 하급심 판결에서 총 3697회 인용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 판결의 주심은 여성인 박정화 전 대법관이었다. 거칠게 표현하면 여성 대법관이 주도해 내놓은 선진적인 젠더 판례가 3000명 넘는 시민의 삶에 영향을 줬다는 뜻이다.
박정화 당시 대법관이 이 사건 주심을 맡았다. 그는 “성인지 감수성을 결여한 판결”이라며 박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했다. 박 대법관은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개인의 성정이나 구체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며 “개별적·구체적 사건에서 성폭행 등 피해자가 처해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배척해선 안 된다”고 판시했다. 법원이 성범죄 사건을 심리할 때 ‘피해자다움’이란 통념, 즉 ‘진정한 피해자라면 마땅히 이러했을 것’이란 고정된 이미지에 갇혀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피고인이 운영하던 노래방에 속칭 ‘도우미’ 여성을 불러 힘으로 제압하고 강간한 일이었다. 당시 피해 여성은 “사람 살려” 소리를 지르는 등 반항했는데도 1·2심은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피고인이 방 밖에 나갔을 때도 피해자가 방에 머물러 있었고, 피해자를 때리거나 협박한 사실이 없고, 피해자가 사력을 다해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판사들에게 기계적 판단을 내리지 말고 ‘피해자다움’이라는 통념을 배제하라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최초로 제시한 것이다. 이 판결은 성범죄 심리에 있어 피해자 중심주의를 선구적으로 끌어들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5년 선고 이후 현재까지 하급심에서 참조 판결로 921차례 인용되기도 했다. 노 대법관은 한발 더 나아간 의견을 남겼다. 그는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의 의미를 해석할 때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의 본질이 ‘동의 부재’에 있다는 점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고 보충의견을 남겼다.성범죄가 아닌 사건에서도 여성 대법관들은 눈에 띄는 목소리를 냈다. 김영란 전 대법관은 200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제사주재자 결정 방법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 반대의견을 냈다. 당시 대법원은 ‘공동상속인들끼리 협의해 제사주재자를 정하라’는 새 기준을 제시하면서 장남이 아닌 차남과 딸도 제사를 주재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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