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의 갈등하는 눈동자] 투쟁 없이는 사랑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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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주 속아 넘어가는 표현이 몇 가지 있다. 아름다움, 너그러움, 산뜻함, 용기 같은 단어들...

내가 자주 속아 넘어가는 표현이 몇 가지 있다. 아름다움, 너그러움, 산뜻함, 용기 같은 단어들. 아주 소중한 말이지만 갈등을 서둘러 봉합하기 쉬운 말이기도 하다. 여러 사정을 들어볼수록, 세상과 치열하게 접촉할수록 남발하기가 어려워지고 만다. 그런 표현 중 제일은 사랑일 것이다. 전에는 사랑을 말하기 위해 사랑스러운 단어를 동원했다. 지금은 다른 게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건 언뜻 보면 사랑의 반대편에 있는 듯한 단어들이다. 정혜윤의 소설 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이 책은 사랑과 저항이 하나임을 천명한다. 모든 존재는 크고 작게 취약하고 취약한 존재를 사랑하다보면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질서와 마주하게 된다. 계속 사랑하기로 결심한 자는 싸우는 자로 거듭난다. 그것이 다름 아닌 연대다.“연대라는 건 아름답지 않은 거구나. 엄청 싸우면서 동행하는 거구나….” 활동가 여름의 말이다. ‘활동가라는 이상한 사람들’에 관해 안담은 이렇게 썼다.

안담의 문장 너머로 활동가들의 특수한 노동이 보인다. 비슷한 문제의식을 지닌 동지들이라 해도 싸우는 방식과 더 절박하게 여기는 부분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적과 싸우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동지와 싸우는 고통에 비하면 말이다. 죽어라 부딪치면서도 같은 현장을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연대는 아름답기만 할 수 없다. 연대에 휘말린 또 다른 사람은 변재원이다. 그는 행정학을 전공하던 학생이었다. 자기계발을 통해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청년이자, 장애인 차별의 문제를 구조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이해했던 장애인이자, 투쟁하는 사람들과는 절대로 엮이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들이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대표인 박경석을 만나게 된다. 박경석은 두 번째 만남에서 난데없이 “쿠오 바디스 도미네”라는 영문 모를 외국어를 냅다 외쳤다. 당연하게도 변재원은 당황하였고, 할 말을 잃은 변재원에게 박경석이 설명한 외국어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런 뒤에 박경석은 짧고 굵게 제안했다. “활동합시다.” 이토록 마력적인 박경석을 통해 변재원은 지난 30년간 전장연이 해온 활동을 파노라마처럼 보게 된다. 한국 현대사를 처음으로 장애인의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었다.은 활동하자는 제안을 수락한 뒤에 겪은 일이 담긴 책이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나 역시 투쟁의 짐을 나눠 지는 한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데모 하는 사람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아버지는 말했지만 시간이 흘러 변재원은 이런 편지를 쓴다. “아버지, 교통 약자의 이동 해방을 이끄는 데 가장 많이 몸을 던진 규식이 형을 기억해주세요. 아버지가 저상버스를 탈 때, 엘리베이터를 탈 때 한 번씩 그의 허무와 고독의 움직임을 이해해주세요.” ‘이동권’이라는 이름의 권리는 전장연의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투쟁하며 만들어낸 문화적 산물이다. 인생과 자신과 타인을 ‘징하게’ 사랑하지 않았다면 결코 지속하지 못했을 활동 속에서 탄생했다. 정혜윤의 소설에서 사랑은 ‘감수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변재원과 전장연의 스승들로부터 나는 사랑과 자유를 위해 무언가를 감수하는 온갖 방식을 배운다. 투쟁은 그런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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