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한국의 임상시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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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개발은 이제 과학의 진보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속도가 성패를 가르는 시대다. 연구실에서 분자 하나를 찾아내고, 그 물질이 동물실험과 임상 단계를 거쳐 약으로 탄생하기까지 통상 10년이 걸린다. 이 가운데 절반의 시간과 전체 비용의 70%가 임상시험에 투입된다. 임상은 신약 개발의 병목이자 핵심 축이다. 치료 대안이 없는 중증 환자에게는 생명을 붙잡..

신약 개발은 이제 과학의 진보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속도가 성패를 가르는 시대다. 연구실에서 분자 하나를 찾아내고, 그 물질이 동물실험과 임상 단계를 거쳐 약으로 탄생하기까지 통상 10년이 걸린다. 이 가운데 절반의 시간과 전체 비용의 70%가 임상시험에 투입된다. 임상은 신약 개발의 병목이자 핵심 축이다. 치료 대안이 없는 중증 환자에게는 생명을 붙잡을 수 있는 희망이기도 하다.

최근 각국은 임상시험의 속도를 높이기 위한 경쟁에 나서고 있다. 미국 식품의약국은 임상시험계획을 제출하면 30일 안에 이의가 없는 한 자동으로 임상에 착수할 수 있도록 한다. 임상 1상에서 FDA가 확인하는 것은 철저히 안전성이다. 독성과 안전성 여유, 초기 약리작용, 품질 관리 등 기본 요건이 충족되면"사람에게 써도 위험하지 않은가"를 기준으로 문이 열린다. 효능은 2b상과 3상에서 본격적으로 검증된다. 초기 단계의 진입장벽을 낮추고, 이후 충분한 데이터를 쌓아 판단하는 구조다. 한국은 방식이 다르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명시적 승인을 받아야 최초 인체 투여가 가능하다. 임상시험용 의약품의 첫 투약 단계인 만큼 세심한 검토는 필수지만, 초기 안전성 평가와 최종 시판 허가 수준의 검토가 같은 깊이로 운영되면 임상 진입 자체가 늦어질 수밖에 없다. 보완 요구가 반복되면 승인이 지연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통계 설계, 동물효능, 품질, 평가 지표까지 폭넓게 살피도록 설계된 제도 구조가 만든 현상이다. 이는 심사관 개인의 보수성 때문이 아니라 초기 단계에서부터 광범위한 자료를 요구하도록 설계된 제도가 빚어낸 결과다. 이런 이유로 상당수 기업이 첫 임상을 한국이 아닌 미국·호주에서 시작한다. 중국 식약청은 올해 9월 혁신 신약과 우선 지원 약물에 대해 임상 승인 기간을 기존 60영업일에서 30영업일로 절반을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30일 간주 승인' 제도다. 30일 동안 이의가 없으면 승인서를 따로 발급하지 않아도 임상이 개시된다. 글로벌 임상시험에 중국 환자가 포함되면 그 데이터를 그대로 허가 심사에 활용할 수 있도록 규제 요건도 완화했다. 국제 경쟁 속에서 한국의 임상 역량은 정체를 보인다. 한국은 전 세계 신약 후보물질의 6%를 보유하고 있지만, 임상시험 점유율은 3~4% 수준에 그친다. 국내 후보물질만으로 진행되는 단일 국가 임상은 2%에도 미치지 않는다. 최근 허가 임상 순위도 세계 4위에서 6위로 하락했다. 임상이 막히면 신약 개발은 해외로 빠져나가고, 환자의 치료 기회 역시 국경 밖으로 밀려난다. 임상시험을 신고한 후 30일 내 자동으로 개시하도록 하되, 부작용 발생 시 즉각 중단할 수 있는 사후 관리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을 검토할 가치가 있다. 심사관은 과도한 책임 부담에서 벗어나고, 환자는 더 이른 시점에 신약 접근이 가능해진다. 지금 우리는 기로에 서 있다. 임상시험과 시판 허가를 명확히 구분하는 미국식 모델을 참고할지, 아니면 초기 단계에서도 허가에 준하는 심사를 지속할지 선택해야 한다. 어느 길을 택하든 심사 역량 강화는 필수적이다. 임상 시스템을 더 빠르고 예측 가능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K바이오가 신약 강국으로 나아가는 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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