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하나. 커다란 가방을 든 ‘아줌마’가 방문하면, 커다란 가방 안에서는 갖가지 화장품이 화수분처럼 쏟아져 나왔다. 얼굴에 팩을 바른 중년 여성들이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수다를 떨 때의 대화는 어딘가 은밀하고 즐거운 톤을 띠고 있으며, 아이들에게 들릴까봐 한껏 소리를 낮추었다. 기억 둘. 한때 녹즙 열풍이 대한민국을 강타했다. 아침마다 윙윙거리던 녹...
1992년 금제라는 가상의 시골 마을에서 여성 4인방이 ‘성인용품 방문판매’에 뛰어들며 벌어지는 좌충우돌을 담은 코미디 의 한 장면. JTBC 제공특수 형태 여성 노동의 문제도 제기기억 하나. 커다란 가방을 든 ‘아줌마’가 방문하면, 커다란 가방 안에서는 갖가지 화장품이 화수분처럼 쏟아져 나왔다. 얼굴에 팩을 바른 중년 여성들이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수다를 떨 때의 대화는 어딘가 은밀하고 즐거운 톤을 띠고 있으며, 아이들에게 들릴까봐 한껏 소리를 낮추었다. 기억 둘. 한때 녹즙 열풍이 대한민국을 강타했다. 아침마다 윙윙거리던 녹즙기 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침마다 문고리에 걸려 있는 파우치 음료로 바뀌었다. 몇달에 한 번씩, 카탈로그와 신제품을 바리바리 짊어진 판매원이 이것저것 맛을 보여주었다. 기억 셋. 집에 찾아오는 학습지 선생님을 피해서 숨어 있던 놀이터 미끄럼틀 아래. 거기에는 나처럼 장롱 밑에 밀린 학습지를 쌓아둔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주인공 한정숙은 우연한 기회에 성인용품 방문판매를 시작한다. “‘성’이 금기시되던 그때 그 시절”이라는 드라마의 공식소개처럼, 30년 전의 한국 사회에서 성인용품을 팔겠다는 여성 주인공의 선택은 마른 짚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일처럼 보인다. 성 문화가 훨씬 개방적으로 변화했다는 2024년에도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이중잣대 속에서 억압과 해방의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여성의 성은 ‘믿을 만한 남성에게만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개방되어야 하며 스스로 그것을 향유하거나 감히 휘두르려 하면 안 됨’ 정도로 취급된다. 음란하다는 평판은 여성을 고립시키는 공격이며, 동서고금을 막론한 유효타이다. 아니나 다를까, 정숙은 마을 사람들에게 냉대와 비난을 받는다. ‘야시꼬리한 물건’을 팔며 마을에 분란을 일으킨다는 수군거림이 따라붙고, 정숙의 엄마마저 남사스러운 짓을 하고 다닌다며 비난한다.
여성 연대의 다른 한 축은 나중에 정숙을 승진까지 시켜주는 ‘판매량’이다. 정숙이 아무리 당당하고 굳세어도 장사가 안되면 일을 계속할 수 없다. 정숙의 방문판매를 처음 마주한 여성들은 소스라치고 기겁하지만, 은근슬쩍 손을 들어 구매 의사를 밝힌다. 코미디에서 빠지지 않는 패턴 중 하나가 바로 아내의 샤워 소리나 정성 들인 반찬을 무서워하는 중년 남성의 이미지다. 이는 중년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과잉의, 처치 곤란의, 잉여의 것으로 치환하여 비가시화하거나 조롱의 대상으로 만든다. 여성을 숭고한 어머니와 아내라는 역할로 한정하여 탈성애화하는 전략은 여성의 욕망을 삭제하여 가정을 지키려는 전략이다. 하지만 는 중년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자연스럽게 다룬다. 판매하려면 파는 사람이 물건에 대해서 가장 잘 알아야 한다는 직업윤리에 입각하여, 정숙은 직접 바이브레이터를 써본다.
가 건드리는 이슈 중 또 하나는 여성 노동이다. 방문판매 시스템은 지극히 한국적이고, 젠더화된 노동이다. 방문판매는 조선시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팔던 방물장수에서부터 유래하지만, 이를 본격적으로 시스템화한 것은 1960년대 초 화장품 회사이다. 판매원이 집집마다 방문해서 직접 물건을 파는 방문판매는 판매원 개인의 마케팅 능력과 구매자 여성들의 네트워크, 판매원과 구매자의 신뢰 관계에 의존한다는 특성이 있다. 화장품 회사의 부흥을 이끌었던 방문판매는 1990년대 이후 IMF 금융위기로 인해 많은 여성이 판매직에 뛰어들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기도 했다. 정숙과 영복이 방문판매를 시작한 1992년은 여성의 초혼 연령이 25세였던 시대다. 기혼-경력단절 여성을 위한 일자리는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다. 그럼에도 정숙과 영복처럼, 어느 시대에나 여성들은 일했다. 와 는 이런 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생생하게 기록한 책이다.
12부작인 는 이제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모든 것을 엿듣기와 엿보기로 해결하는 남자 주인공 도현의 존재가 생뚱맞긴 하지만, 빠지면 섭섭한 게 로맨스니까 이 정도는 넘어가자. 금기와 편견을 가로지르는 4인방의 유쾌한 완주를 기대한다.
United States Latest News, United States Headlines
Similar News:You can also read news stories similar to this one that we have collected from other news sources.
[이진송의 아니 근데]‘한 입’이 삼켜버린 공정…프로그램 완성도는 “이븐하지 않네요”세상에는 그런 것들이 있다. 보고 싶지 않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하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줘서 어딜 가든 맞닥뜨리고 마는,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정보가 주입되는 이른바 ...
Read more »
[이진송의 아니 근데]이성애는 언제나 ‘남성상위’…넷플릭스 영화 ‘오늘의 여자 주인공’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성범죄를 당하지 않으려면 여성이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막상 조심하면 “지금 나(또는 모든 남성)를 잠재적 가해자로 보는 것...
Read more »
‘이생망’ 아줌마들의 발칙한 반란, ‘정숙한 세일즈’[多리뷰해][多리뷰해 (73) ‘정숙한 세일즈’] 악녀 ‘천서진’은 잊어라 그래도, 애들은 재우고 보세요 女女女女 죽여주는 케미…추억 돋는 레트로 감성
Read more »
‘정숙한 세일즈’ 김선영 “죽여주는 케미, 카타르시스 느꼈다”‘정숙한 세일즈’의 김선영이 여배우들의 케미스트르를 예고했다. 11일 서울 강남구 엘리에나 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JTBC 새 토일드라마 ‘정숙한 세일즈’(극본 최보림/연출 조웅) 제작발표회에서 “넷 중 하나가 빠지면 섭섭할 정도로 케미스트리가 죽인다. 죽여주는 케미스트리”라고 강조했다. 옆에 있던 김성령 역시 “(각자의) 결은 다르지만 기대 이상”이라고
Read more »
김소연이 ‘천서진’에 빙의?…흑화한 ‘쎈 언니’들‘정숙한 세일즈’의 김소연 김성령 김선영 이세희가 흑화한다. JTBC 토일드라마 ‘정숙한 세일즈’(연출 조웅, 극본 최보림, 제공 SLL, 제작 하이지음스튜디오, 221b) 지난 방송에서 혼자 동창 집에 방문판매를 나갔던 한정숙(김소연)은 대형 위기를 맞았다. 성인용품을 판다는 이유로 정숙을 낮잡아 본 경식(심우성)이 그녀를 위협한 것. 때마침 김도현(연우
Read more »
이재명 “여의도 사투리 싫다는 한동훈, 신속히 만나 현안처리하자”“‘경제위기 아니’라는 경제부총리, 달나라 사시나” 단통법 폐지·예금자보호한도 상향·지구당 논의 제안
Read mo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