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이 코앞인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을 위한 특별한 국어 활동
모든 이들이 충격, 공포, 경악, 처참, 슬픔으로 점철된 연말을 연대와 위로로 간신히 버텨나가는 작금의 시대이지만, 학교에서 아이들과 생활하고 있는 덕분인지 세상의 고통에서 잠시라도 해방될 때가 있다. 고입전형으로 기말고사가 11월 초반에 끝난 중3 학생들의 학교 생활은 수능을 끝낸 고3 학생 뺨친다. 필기구와 교과서가 없는 학생이 수두룩하고 아직 못 끝낸 교과서 진도를 나갈라치면 볼멘소리가 교실 천장을 뚫고 나갈 기세이다. 겨우 어르고 달래서 교과서 진도를 다 마쳤지만 졸업식은 아직 멀었고, 심야괴담을 보자고 조르는 아이들을 또 타일러서 조금이라도 그들의 인생에 도움이 될 시도를 이것저것 해본다. 그 시도 중 하나는, 국어 교사라면 한 번쯤은 해봤을 비슬라바 쉼보르스카의 을 모방해서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시로 짓는 활동이다. 학기 초든 말이든 언제 해도 학생들 반응이 제법 괜찮다. 시는 아래와 같다(이 수업을 처음으로 만든 선생님 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영화를 더 좋아한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바르타 강가의 떡갈나무를 더 좋아한다. 도스토옙스키보다 디킨스를 더 좋아한다. 인간을 좋아하는 자신보다 인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하는 나 자신을 좋아한다. 실이 꿰어진 바늘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한다. 초록색을 더 좋아한다. 모든 잘못은 이성이나 논리에 있다고 단언하지 않는 편을 더 좋아한다. 예외적인 것들을 더 좋아한다. 집을 일찍 나서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의사들과 병이 아닌 다른 일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한다. 줄무늬의 오래된 도안을 더 좋아한다. 시를 안 쓰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 시를 써서 웃음거리가 되는 편을 더 좋아한다. ...(이하 생략) 빨리 이 활동을 하고 싶었는데, 못다 한 진도도 끝내야 하고 각 부서에서 전환기 중3 학생을 위해 마련한 여러 프로그램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어 지난주 목요일이 돼서야 겨우 한 반하고 이 수업을 할 수 있었다. 평소 이 반은 나와 궁합이 잘 맞고, 정말이지 반의 모든 학생들이 예뻤던 터라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를 가득 안고 반에 들어갔다. 마침, 그날이 마지막 수업이었다. 평소 끊임없는 수다로 선생님들 혼을 쏙 빼놓는 겨울이(가명)가 웃으면서'선생님, 정말 마지막 시간까지 진짜로 수업하시네요. 정말 대단하세요' 한다. 나도 웃으면서 가볍게 눈을 흘린 후 준비한 활동지를 나눠주면서 학생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언제가 가장 행복하니? 선생님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하더라. 그럼 내가 뭐를 좋아하는지 알고 있어야겠지? 활동지의 왼쪽 시 을 참고해서 본인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천천히 생각해 보고 한 번 적어보렴. 대단한 걸 적는 게 아니야. 소확행 알지? 날 행복하게 하는 소소한 것들을 적어보는 거야. 다 적은 후엔 돌아가면서 낭송해 볼 거야.' 아이들에게 안내한 후 나는 어느 정도 시간을 주고 순회했다. 졸업이 코앞이라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대부분의 학생이 금세 집중했다. 어렵지 않은 활동이라서 하기 싫어하거나 평소 글쓰기에 어려움이 있었던 학생이더라도 몇 줄 이상은 적는다. 학생들이 모방시를 다 지은 거 같아 한 명이 자원해서 발표한 다음 그 사람이 지목해서 이어가자고 하니 서로 분위기를 살피다가 여름이(가명)가 손을 번쩍 든다. 다들 여름이에게 시선이 쏠리고, 여름이와 목하 열애 중인 겨울이도 여름이에게 집중한다. 여름이가 일어나서 본인이 꾹꾹 눌러쓴 시를 침착하게 낭송하기 시작한다. 몰티즈보다 러시안 블루를 더 좋아한다. 뼈보다 순살 치킨을 더 좋아한다. 새우깡보다 먹태깡을 더 좋아한다. 치킨보다 치킨마요 덮밥을 더 좋아한다. 돈을 모으는 것보다 쓰는 것을 더 좋아한다. 잘 생긴 것보다 귀여운 것을 더 좋아한다. 간장게장보다 도토리묵을 더 좋아한다. 맨투맨보다 후드집업을 더 좋아한다. 드라마를 좋아한다. 자치회보다 방송부를 더 좋아한다. 콜라보다 사이다를 더 좋아한다. 패스트푸드보다 한식을 더 좋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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