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콜라가 흙으로 돌아간 화분, 희망이 된 바질 한 줄기 [한겨레 프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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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환봉 | 법조팀장 바질을 키운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바질만 남았다. 루콜라는 한철 메뚜기처럼 화분을 습격해 빽빽이 잎을 틔우다 한순간 시들어 흙으로 돌아갔다. 레몬밤은 싹도 나지 않았다. 3개월 전 화분에 쏟아부은 480알의 씨앗 중 지금까지 제대로 살아남은 것은 바

‘윤석열 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 지난 4월5일 오후 서울 경복궁 동십자각에서 연 ‘승리의날 범시민대행진’에서 참석자들이 민주주의 승리를 외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바질을 키운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바질만 남았다. 루콜라는 한철 메뚜기처럼 화분을 습격해 빽빽이 잎을 틔우다 한순간 시들어 흙으로 돌아갔다. 레몬밤은 싹도 나지 않았다.

3개월 전 화분에 쏟아부은 480알의 씨앗 중 지금까지 제대로 살아남은 것은 바질 한주뿐이다. 식물을 키우는 데 소질이 없다는 것은 오래전 알았다. 이성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변명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다. 비상계엄 이후 내란 수사와 탄핵심판 취재로 정신이 없었다. 급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늘 긴장하며 정신을 차려야 했다. 동요도 할 수 없었다. 흔들리면 발을 헛디딜 수밖에 없으니. 머리도 심장도 차가워야 했다. 4월4일 탄핵심판이 마무리되고야 숨을 쉴 여유가 생겼다. 부담을 내려놓은 4월 어느 날, 동네 개천을 따라 걸었다. 볕이 따뜻했다. 따스함을 품은 푸른 것이 그리웠다. 계획도 없이 화분과 흙과 씨앗을 샀다. 나중에 찾아보니 레몬밤은 키우기 어려워도 바질과 루콜라는 알아서 큰다고 했다. 그 말을 믿었다. 거짓말이었다.억울했다. 바나나 껍질을 깨끗하게 씻어 담근 물을 비료로 줬다. 달걀 껍데기도 곱게 빻아 화분에 넣었다. 물을 제때 줬냐고 물으면 조금 곤란하지만, 양심에 거스를 정도로 방치하진 않았다. 유튜브를 보면 이 정도로 하지 않아도 베란다가 바질이나 루콜라 숲이 되는 영상이 허다하다. 세상을 불신하다 나 자신을 자책하길 반복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에겐 아직 바질 한주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처럼 장엄하진 않아도 나름의 결의를 세웠다. 쉬는 날을 틈타 꺾꽂이를 했다. 네마디 정도 자란 바질의 마지막 마디 세개를 잘랐다. 각진 페트병에 물을 담은 뒤 마개를 막고 송곳으로 옆면에 구멍을 세개 뚫었다. 그곳에 자른 바질 마디를 꽂았다. 이제 뿌리가 나길 기다렸다 루콜라가 묻힌 화분에 옮겨 심을 요량이다.좌절과 희망의 순서도를 이어준 것은 고작 바질 하나였다. 그 하나가 없었다면, 순서도의 끝은 나에게 식물을 키우는 데 소질이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됐을 것이다. 아울러 적어도 앞으로 몇년 동안은 식물을 키울 일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탐스럽게 잎을 펼친 바질 하나가 식물 재배의 개인사를 이어가게 해줬다. 44년 만에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난겨울, 좌절했다. 굳건하다고 여겼던 절차적 민주주의마저 권력자 한명에 의해 손쉽게 무너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더 많은 평등과 더 많은 자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적어도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이룬 토대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 바탕을 둬서다. 그런 믿음이 무너졌다.그 뒤로 7개월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계엄 전의 꿈을 다시 꿀 토양은 마련되고 있다고 느낀다. 이젠 희망을 가져도 괜찮을 것 같다. 그렇게 우리 사회는 비상계엄에서 마침표를 찍지 않고 여느 때와 같은 여름을 맞이했다. 요즘에는 그 사이를 이어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곤 한다. 바질을 키우며 ‘저절로 되는 일’이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가지 이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권력을 가진 이들의 착각과 달리 우리 군은 부당한 명령에 주저했다. 시민들은 주저하지 않고 국회 앞으로 모여 계엄군을 막았고 탄핵이 결정될 때까지 거리를 지켰다. 수많은 음모론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여도, 대다수 시민은 부정선거와 같은 극단적 주장을 믿지 않았다. 여러 부침이 있었지만, 수사기관들은 현직 대통령을 체포한 뒤 구속해 재판에 넘겼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탄핵을 결정하며 자신의 몫을 했다. 개혁의 책무를 맡은 새 정부가 그 숱한 과정 속에서 우리 사회의 싹을 다시 틔운 힘이 무엇인지 찾아내고 주목해주면 좋겠다. 희망은 전혀 새로운 것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것에서 비롯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루콜라가 양분이 된 화분에서 꺾꽂이를 한 바질이 무럭무럭 자랄 것이라 기대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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