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인 1946년 어느 날이었다. 대구사범대에 재직 중이던 금석학자 임창순(1914~1999)이 길을 걷다가 대구 대안동의 어느 집(...
해방 직후인 1946년 어느 날이었다. 대구사범대에 재직 중이던 금석학자 임창순이 길을 걷다가 대구 대안동의 어느 집 앞에 놓인 둥근 형태의 비석을 발견했다. 임창순 선생은 단박에 ‘명문 신라 고비’로 판단했다.경북 영천의 청제 제방을 쌓고 수리하는데 7000명~1만4140명이 동원되었음을 알려주는 명문비석. 1968년 학계에 보고되었다.|국가유산청 제공 이 비석의 원 위치는 알 수 없었다.
후속 연구에 따르면 비석이 발견된 대안동 서태균의 집이 조선시대 경상 감영에 속해있었다. 따라서 누군가 이 근처에 서있던 비석을 관청으로 옮겨놓았을 가능성이 짙다. 임창순은 이 비석을 ‘무술 오작비’로 명명했다.나 와 같은 역사서에도 보이지 않는 ‘오’가 어떤 시설일까. 임창순은 중국에서 그 용례를 찾았다.1946년 금석학자 임창순이 대구 시내에서 확인한 무술오작비. 임창순은 “무술년에 ‘오’축조한 공사 내역을 기록한 비석’으로 읽고, 중국 자전을 인용, ‘오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군사용 보루’로 추정했다. |하일식 연새데 교수 제공당시 한국일보가 주관한 ‘신라 삼산 학술 조사단’이 영천을 답사중이었다. 는 “신라는 국왕이 주재하는 국사 제사를 나력과 골화, 혈례 등 3산에서 치렀다”고 했다. 조사단은 삼산 중 한 곳으로 영천 지역을 답사하다가 읍내에서 몇몇 유지를 만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들었다. “청못이라는 저수지에 당나라 비석이 있다”는 것이었다. 영천 청제비의 현현 1968년 12월 경북 영천 지역을 답사 중이던 학술조사단이 “청제이라는 저수지 주변에 당나라 명문비석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아닌게 아니라 읍지인 에 명문 비석의 존재가 기록되어 있었다.지금도 금호강 동편 드넓은 평야의 수리를 맡고 있는 저수지였다. 과연 청못의 북쪽 40m 되는 골짝의 비탈에 비석이 2기 나란히 서 있었다. 예부터 주민들은 물론이고 멀리서 찾아온 낚시꾼들에게까지 잘 알려진 비석이었지만 그 가치를 아는 이들은 없었다. 비석 2기 중 1기에는 앞 뒷면에 모두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한쪽 면에 ‘병진년 2월8일’ 명문을 시작으로 100여 자의 글자가 나타났다. 그 비석의 다른 면에는 ‘정원14년 무인 4월’자를 필두로 100여자의 글씨가 보였다. 다른 1기는 ‘강희27년 무진 9월’라는 간지가 또렷한 비석이었다.후속 판독결과 명문 비석의 실체가 드러났다. ‘병진’명 쪽 면에 일찍이 방어용 제방으로 지목되었던 ‘오’자가 보이고, ‘정원14년’명 쪽에 현재의 ‘저수지 이름’을 연상케하는 ‘청제’가 연결되었다. 정리하자면 ‘병진’명과 ‘정원’명이 앞 뒤로 새겨진 비석 1기는 ‘병진년에 큰 제방을 쌓았고’, ‘정원14년 청제를 대대적으로 수리한’ 공사 내역을 기록한 것이었다. 최초 조사 중 비석 2기가 청못의 북쪽 골짜기 비탈에 서 있었다. 비석은 2기였다. 그중 1기에는 앞 뒷면에 모두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한쪽 면에 ‘병진년~’, 다른 면엔 ‘정원14년~’자를 시작으로 한 글씨가 각 100여자씩 보였다. 다른 1기는 ‘강희27년’라는 간지가 또렷한 비석이었다. 말하자면 이 두 기의 비석은 ‘청제’라는 저수지를 쌓고 대대적으로 수리한 1기와, 훗날 매몰된 청제비를 일으켜 세운 뜻을 기념한 1기임을 알 수 있다. 이 두 기의 비석에 ‘청제비’라는 이름이 붙었다. 무술오작비의 ‘오’는 청제비에서 ‘대오’로 등장한다. 중국에서 군사용 방어 제방으로 해석되는 ‘오’가 신라에서는 ‘관개용 저수지 제방’으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건립비는 그냥 오가 아니라 대오, 즉 대규모 저수지 제방으로 표기했으며, 그것을 수리비에서는 청제로 바꿔 기록했음을 알 수 있다.병진’명과 ‘정원’명이 앞뒤로 새겨진 비석 1기는 ‘병진년인 536년 큰 제방, 즉 대오을 쌓았고’, 정원14년 청제로 이름이 바뀐 저수지 제방을 대대적으로 수리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판독되었다.|불교중앙박물관 제공우선 “531년 3월에 담당 관청에 명하여 제방을 수리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눈에 밟힌다. ‘수리’라는 내용에 주목한다면 ‘476년 병진년’에 축조한 저수지를 이때 ‘수리’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536년 병진년 축조설’이 학계의 다수설이다. 우선 신라에서 ‘경위’는 6세기 초에 성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청제 건립비에는 대사제 소사제 대오제 등 경위가 보인다.또 ‘관직명’을 표기할 때 ‘제지’라는 어미를 사용하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지’자가 탈락하고 제만 사용된다. 그러다가 그마저도 ‘제’자가 사라지고 관직명만 남게 된다. 그런데 울진 봉평리비와 천전리 서석에는 ‘~제지’가 어미로 등장한다. 따라서 경위에 ‘~제’ 어미만 남은 청제 건립비는 봉평비와 천천지 서석보다 늦은 단계의 비석임을 알 수 있다.영천 청제비는 536년 저수지 조성을 위한 제방를 쌓은 ‘건립비’와, 이를 대대적으로 수축한 ‘수리비’, 그리고 건립·수리 사실을 새긴 비석이 매몰된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그 내력을 기록한 ‘중립비’ 등 3종세트로 구성되어 있다.|국가유산청·불교중앙박물관 제공 또한 울진 봉평비-경주 명활산성비-창녕 진흥왕 척경비-대구 무술 오작비 등은 모두 간지를 앞세웠다. 즉 갑진-신미-신사-무술 등이다. 반면 503년 건립된 냉수리비는 간지 대신 ‘사라훼~’로 시작한다. 물론 가장 오래된 비석으로 추정되는 포항 중성리비도 ‘신사’로 시작되기는 한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524~578년 사이에 건립된 비석이 모두 ‘간지’로 시작되는 것에 주목하여 ‘청제 건립비의 병진=536년’으로 해석하고 있다.1946년 발견된 무술오작비의 ‘오’는 청제비에서 ‘대오’로 등장한다. 중국에서 군사용 방어 제방로 사용되는 ‘오’가 신라에서는 ‘관개용 제방’으로 쓰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병진년 2월8일 탁곡에 있는 대오다. 저수지의 아랫변 길이는 61심, 윗변 길이는 92심, 바닥너비는 32심, 둑의 높이는 8심, 위의 너비는 3심이다. 동원 인원은 7000명이고 280방으로 나눠 작업. 공사책임자인 사인은 훼부의 안척사지 대사제, 척차추 소사제, 휴리 대오제… 중사촌의 자시리 간지, 사이리이다.’청제비 중 수리비와 중립비에는 연호가 새겨져 있지만 건립비에는 간지명만 보인다. 그렇다면 왜 ‘병진년’을 ‘536년’으로 특정할 수 있을까. “정원 14년 4월13일 청제를 수리하고 기록…청제의 둑이 상했다는 보고에 따라 소내사에게 살피라고 구두로 지시… 아랫변의 길이는 35보, 둑에서 수직 아래로 깊이는 6보3척, 상배굴리는 12보…2월12일 시작하여 4월13일 수리 완료했다. 도끼를 다루는 자는 모두 136명, 동원된 인원은 모두 1만4140명…전대등이 절화군과 압량군에서 각각 100인을 부리게 함…공사 책임자는 소내사….”“영천 남쪽에 청제가 있고, 그 북쪽에 비석이 있는데…이 제방은 300여 석 지기에 관개…지금까지 이익을 얻고 있음…계사 비석이 훼손되어 티끌 속에 매몰…고적을 알 수 없어 애석…이제 다시 비석을 세워 기록하니….”에서 “531년 3월에 제방을 수리했다”는 기사가 눈에 띈다. 청제 건립비에는 대사제 소사제 대오제 등의 경위가 보인다. ‘제’ 자는 청제 건립비에서만 보이는 존칭어미이다.‘건립비’를 보면 공사책임자는 대사·소사·대오·소오 등 중앙관리가 맡았다. ‘수리비’에는 왕명을 받은 ‘소내사’가 저수지 제방 상태를 살피고 공사도 진두지휘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중 ‘소내’는 ‘왕실 직속 혹은 직할’의 의미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신라에서 ‘관직’명을 표기할 때 ‘제지’ 같은 어미를 사용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지’자가 탈락하고 제나 부 자만 사용된다. 그러다가 그마저도 ‘제’나 ‘부’자 사라지고 관직명만 남는다. 524년과 552년 새겨진 울진 봉평리비와 천전리 서석에는 ‘~제지’가 어미로 등장한다. ‘제’자만 보이는 청제비의 조성연대가 두 비석보다 늦을 가능성이 크다. 또 6세기에 제작된 신라 명문 비석에는 ‘간지’로 시작되는게 일반적이다. 는 이 기사를 전하면서 김유신과 김인문 등 공신들에게는 ‘하사했다’고 한 반면, 소내와 관청에는 ‘소속시켰다’고 표현했다. 게다가 ‘소내’는 가장 먼저 언급되어 있다. 통일의 일등공신인 김유신보다 4배 가까이, 그리고 관청보다도 2배 이상 말 목장을 배속받았고, 가장 먼저 언급된 ‘소내’는 왕실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청제 ‘수리비’에는 왕명을 받은 ‘소내사’가 저수지 제방 상태를 살피고 공사도 진두지휘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중 ‘소내’는 ‘왕실 직속 혹은 직할’의 의미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세종문화유산재단·불교중앙박물관 제공아마 중앙정부 파견자 5명이 축조공사를 맡은 대오 시절에도 역시 왕실 직할지였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초축 후 어느 순간인지는 몰라도 청제라는 이름을 얻었고…. 그렇기에 7000여 명~1만4000여명이라는 대규모 인원이 투입되었을 것이다.669년 문무왕은 삼국통일 기념으로 전국의 말목장 174곳을 나눠줬다. 그런데 ‘통일의 일등공신인 김유신에[게는 ‘하사’라고 한 반면, 소내와 관청에는 ‘소속시켰다’고 표현했다. 여기서 언급한 ‘소내’와 청제 수리비의 ‘소내’는 ‘왕실’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설득력있게 제기됐다.|하일식 교수 설명‘배굴리’는 저수지 물을 빼내 논에 대는 목통을 가리킨다. 그 형태는 후대의 기록인 1395년 7월30일자에 나와 있다. “수구에 돌로 도랑을 만들어 그 위를 쌓게 하고…도랑 안쪽에 나무통을 세우고 나무통 안쪽 3~5개 구멍을 만들어 물의 높낮이를 따라 통하거나 막히게 하며, 도랑 바깥으로는 나무통을 두되 두 끝을 비워 두고, 그 밑으로는 좌우로 물을 내려서 끌어가도록 하고….”그런데 지금도 영천 사람들은 ‘빼구리’라 한다. 신라인들이 목통이나 수통이라는 한자 대신 ‘빼구리’라는 순수 우리말을 ‘배굴리’라는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청제에는 상··하 배굴리가 존재했고, 798년 손상된 상배굴리를 수리했을 것이다. ‘배굴리=빼구리’는 무려 1200년 넘게 이어진 표현인 셈이다. 청제비문은 이외에도 ‘이와같이 하기를’의 뜻인 ‘차여위’라는 한국식 한문을 썼고, ‘사이에=간중’이라는 이두식 표현도 사용했다.청제 ‘수리비’에 등장하는 ‘상배굴리’라는 용어가 눈길을 끈다. ‘~상배굴리 12보를 수리했다’는 내용이다. ‘배굴리’는 저수지 물을 빼내 논에 대기 위해 설치하는 목통이다. 지금도 영천 사람들은 ‘빼구리’라 한다. 신라인들은 한자 대신 ‘빼구리’라는 순 우리말을 한자 배굴리’로 표현한 것이다.|진성섭 세종문화유산재단 원장 제공‘건립비’에는 초축 당시의 제방 규모를 언급하고 있다. 즉 ‘둑 아랫부분 길이=61심, 윗부분 길이=92심, 바닥 너비=32심, 높이=8심, 윗부분 너비=3심’이라 했다. 당시 삼국의 기준척은 중국 남조척이었고, 1심=8척으로 계산했다.최근의 지표조사 결과 현재의 무넘기 남쪽에 예전에 조성된 무넘기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무넘기’는 물이 넘치지 않게 일정 수위에 찼을 때 흘려보내는 수로를 가리킨다. 주로 저수지의 옆 쪽에 조성한다. 그런데 지표조사에서 확인된 옛 무넘기 간의 길이를 합산해보면 193m로 측정된다. 이 길이는 ‘청제 건립비’의 둑 윗부분과 엇비슷하다. 따라서 최근 확인된 무넘기 흔적이 바로 536년 초축된 대오의 부속 시설으로 추정된다.최근 청제의 지표조사 결과 현재의 여수로 남쪽에 예전에 조성된 여수로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536년 초축 당시에 조성된 여수로인 것으로 보인다.|세종문화유산재단 제공자그만치 1900년 전인 144년 2월로 돌아가보자. 일성왕은 “농사는 정치의 근본이며,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여긴다”면서 “전국에 제방을 수리·완성하고 농토를 개척하라”는 명을 내렸다. 최초의 저수지 축조 기사이다.5세기 들어 주작물이었던 맥류가 줄고 벼농사가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벼를 재배하면 밭에서 잡곡을 경작하는 것보다 2배 이상 수확할 수 있었다.최근 지표조사에서 확인된 옛 무넘기까지의 길이를 합산해보면 193m로 측정된다. 이 길이는 ‘건립비’의 둑 윗부분과 엇비슷하다. 최근 확인된 여수로 흔적이 바로 536년 초축된 대오의 부속 시설이 아닐까 추정된다.|김재홍 관장 설명 따라서 논의 확대는 농업생산성의 증대와 직결됐다. 신라인들은 물을 대서 벼를 심는 ‘수전’ 용어를 한글자로 줄인 ‘답’으로 쓸만큼 애착을 보였다. 561년 건립된 창녕 척경비는 굳이 논과 밭으로 구별하여 ‘전답’으로 표기할 정도였다.또 의미심장한 기사가 502년 3월에 나타난다. “지증왕이 전국에 농사를 권장하고 소를 부려 논밭을 갈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경의 전국적인 확대를 일컫는다. ‘우경’으로 노동력을 크게 줄이고, ‘깊이갈이’로 병충해와 잡초를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었다.144년 2월 일성왕은 “농사는 정치의 근본이며,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여긴다”면서 “전국에 제방을 수리·완성하고 농토를 개척하라”는 명을 내린다. 최초의 저수지 축조 기사다.또 502년 “전국에 농사를 권장하고 소를 부려 논밭을 갈도록 했다”고 기록했다. 우경의 전국적인 확대를 일컫는다.에 따르면 5세기 13차례의 홍수와 가뭄에 직면했다.이 덕분일까. 6~7세기 사이 자연재해는 눈에 띄게 줄어 200년간 10회에 그친다.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한 저수지 축조 사업이 효과를 얻은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홍수와 가뭄이 빈번했던 시기는 5세기와, 8~9세기였다. 반면 적게 발생했던 시기는 제방과 저수지가 축조되거나 직후인 6~7세기와 10세기였다. 저수지 축조와 자연재해가 불가분의 관계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김재홍 관장 설명에도 8~9세기 저수지와 제방 축조 기사가 줄을 잇는다. 청제 축조 8년 전인 790년 “전주 등 7주 백성들을 징발해서 김제 벽골제를 증축했다”는 기사가 우선 보인다. 청제 수축 못지않게 대규모 인력이 동원된 대규모 토목공사였을 것이다.이후 10세기 들어 자연재해 기사는 단 2차례 등장한다. 정리하자면 홍수와 가뭄이 빈번했던 시기는 5세기와, 8~9세기였다. 반면 적게 발생했던 시기는 제방과 저수지가 축조되거나 직후인 6~7세기와 10세기였다. 이것이 우연인가 필연인가. 최근 그간 보물로 지정되어 있던 영천 청제비가 국보로 승격예고됐다. ‘건립비와 수리비’, 그리고 ‘중립비’ 등 2건으로 구성된 ‘청제비’에는 물 관리로 자연재해를 극복하려던 선조들의 분투가 글자 글자마다 담겨있다. 새삼 중립비문에 새긴 ‘비석을 다시 일으켜 세운 이유’가 귀에 쟁쟁하다. “이제 비석을 다시 세워 기록하니 아! 후손들이 이 비석 덕분에 제방이 무너지지 않게 된다면…비석이 제방에 큰 도움이 되리라.”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노중국,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본 영천 청제와 청제비-그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 ,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2023이미란, ‘영천 청제비 병진명으로 본 신라 중고기 오의 축조와 그 운영’, 64권, 동국대 신라문화연구소, 2024 문화 많이 본 기사 진성섭, ‘영천 청제비의 구조와 의미’, ,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2023
1만4140명이 고쳤다’…신라 왕실의 ‘저수지’ 프로젝트
United States Latest News, United States Headlines
Similar News:You can also read news stories similar to this one that we have collected from other news sources.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수장고에 꽁꽁 숨긴 ‘천마총 인물화’…‘깔끔쟁이’ 신라인의 화장실 88곳경주 천마총(6세기초 조성) 하면 어떤 유물이 떠오를까. 1973년 조사된 이 왕릉급 무덤에서 쏟아져 나온 1만1500여점 중에서…. 두말...
Read more »
일터에서 마시는 커피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커피로 맛보는 역사, 역사로 배우는 커피] 주4일제 논쟁을 보며 떠오른 2002년의 교훈
Read more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과학으로 증명한 ‘639년의 낙뢰’, 그 순간…무왕의 익산 천도 3번째 퍼즐 맞췄다‘이것이 꼭 1386년 전인 639년 떨어진 벼락(낙뢰)의 흔적이다.’ 얼마전 (2025년 3월호)에 따끈따끈한 논문이 실렸...
Read more »
신라 금동관에서 비단벌레 장식 첫 확인…하트 모양 장식에 붙여신라 고분에서 나온 금동관에서 비단벌레 장식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금관을 포함해 지금까지 출토된 금동관에서 비단벌레 날개장식이 확인된 사례...
Read more »
불교계 “국힘 김문수 기독교 편향 발언 사과하라”“헌법 전문 명시된 건국 역사 부정·왜곡하면서까지 편향적인 발언”
Read more »
경주 쪽샘유적서 최초 확인된 돌방무덤, 5차례 걸쳐 독특한 형태로 매장국가유산청은 올해로 6번째인 쪽샘지구 유적 발굴에서 신라 돌방무덤(K91호 무덤)과 덧널무덤(J230호 무덤)을 조사해 신라 지배 계층의 ...
Read more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7000명이 쌓고, 1만4140명이 고쳤다’…신라 왕실의 ‘저수지’ 프로젝트](https://i.headtopics.com/images/2025/6/3/kyunghyang/9151060445925481590842-9151060445925481590842-8D5617DF712B9C024F3E1B05B0DC6784.web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