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말로 하는 연습뿐만 아니라 신체적 폭력에 직면했을 때에 ‘얼어붙지 않으려면’ 연습이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이 의사표현을 잘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연애도 계약하듯 상대방과 내가 관계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을 잘 따져보고, 상대방에게 내 마음을 전달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Y가 말했다. 모두가 의사표현에 능숙한 것도 아니고, 사랑한다면 상대방이 무슨 마음인지 알아봐주는 게 서로에 대한 당연한 태도가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의사표현이 쉽지 않다는 점에는 동의했지만, 수동적으로 상대방이 나를 알아봐주기를 기다리는 태도에 대해서는 마냥 긍정하기 어려웠다.
“그러면 기다리는 사람만 슬퍼지잖아.” 나는 대답했다.상대방에 대해 파악하고, 끊임없이 소통하는 일은 생각보다 수월하지만은 않다. 매순간까지는 아니어도 ‘나는 어떤 연애를 원하는가?’와 같은 자기성찰이 필요하고, 상대방에게 ‘나는 이것을 원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진정 원하는지를 떠올리는 것도, 이를 연인에게 말하는 것도 결코 쉽지가 않다. 일반 계약을 체결하는 일이라면 그저 이해관계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조금 더 단순하게 원하는 것을 정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매매계약의 경우 한쪽은 물건을 이 가격에 사고 싶고 반대쪽은 물건을 저 가격에 팔고 싶다, 식의 의사표시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계약이라 하더라도 거래 상대방이 지속적으로 거래를 맺어온 사람이거나, 개인적으로 친분을 유지해야만 하는 특별한 관계에 있다면 본인이 계약을 통해 얻으려는 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아무리 자기표현에 능숙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상대방이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한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짐작할 수 없는 그 시작선 앞에서는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한다. 물건 가격이 너무 비싸다고 말했다가 ‘행여나 상대방이 기분이 상하면 어떻게 하지’ 같은 고민을 추가로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계약 내용까지 복잡하다면 무엇이 이득이 되는 것인지 선뜻 판단하기 어려워서 더더욱 그렇다. 그렇지만 생활이 걸린 계약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낸다. 예를 들어, 임금채권의 경우에는 소멸시효가 3년으로 정해져 있어서 이 기간 내에 청구하지 않으면 권리행사가 어려워진다. 3년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에 이를 요구하는 일을 주저하거나 지체해서는 안된다. 이를 알고 나면 의사표시가 어려운 사람도 어떤 방법으로든 용기를 낸다.연인과의 관계에도 적시에 의사표현을 하는 것은 중요하다. 상대방에게 기분이 상하는 일이 있었을 때, 그때는 괜찮다고 넘어갔거나 별달리 반응하지 않는다면 상대방은 나의 기분을 전혀 알지 못하고 같은 상황을 반복해서 만들지도 모른다. 혹시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저 사람을 기분 상하게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말을 주저하다가 결국에 나만 계속 기분 상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감정이나 의견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능숙하거나 그렇지 못하고의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그렇지만, 나의 필요와 바람을 읽고 싶어 하는 상대방에게 정돈된 리스트를 적극적으로 쥐어주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우리의 관계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달하기 위한 노력은 분명 필요하다. 아무리 연인이라고 해도 서로에게 기대해도 되는 배려에는 한계가 있다. 상대방이 ‘알아서’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사실 조금 무리한 요구가 아닐까 생각한다.진실을 마주하는 게 속이 상하는 일이라도,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라도 그걸 말하고 들을 수 있는 관계가 된다는 건 또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내가 상대방에게 나를 보여줄 용기와 상대방이 내게 스스로를 보여줄 용기, 그 두 개만 있다면 두 사람 사이의 벽을 금방 넘어버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용기 내어 말했다가 그나마도 지켜오던 관계가 깨지는 것도 두렵지만, 관계가 깨질까봐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채로 버둥대며 버려질까 두려워하는 것 또한 슬픈 일이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용기를 내라고 말하고 싶다.생각을 말로 하는 연습뿐만 아니라 신체적 폭력에 직면했을 때에 ‘얼어붙지 않으려면’ 연습이 필요하다. 여성들은 강남역 사건과 같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러 범죄에 노출되어 있다. 일명 ‘썬학장 사건’은 여성을 물건으로 대하고 거래하는 ‘강간문화’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음을 알려준다. 여성들을 위한 각종 호신용품의 판매 또한 늘어나고 있지만 사실 호신용품을 들고만 다녀서는 나를 보호하지 못한다. 그 물건을 실제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갖춰야 할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위기 상황에서 가방에 있는 호신용품을 꺼내겠다는 생각,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민첩성, 정 안되면 가해자의 급소를 발로 차버리겠다는 용기까지 준비되었을 때 그제야 호신용품을 사용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가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위기에 처한 여성이 기지를 발휘해 하이힐을 괴한의 발에 내리꽂는다든지, 급소를 발로 차거나, 이로 상대의 팔을 물어뜯는 장면 같은 것들이 나오는데, 그러한 행동을 실제로 실행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나의 경험을 비추어봐도 처음 권투를 배웠을 때 보호대를 착용한 상대방이 괜찮으니 어서 자기에게 주먹을 날리라고 말하는데도 쉽게 손이 나가지 않았다. 사람을 때리는 행위에 대한 심리적 장벽이 너무나 높았던 것이다. 용기를 내서 겨우 얼굴을 한 대 쳤을 때 느낀 그 감각, 심리적 동요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큰소리를 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평소에는 일정 데시벨 이상으로 소리를 크게 낼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막상 위기 상황에서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기가 쉽지 않다. 스스로의 장벽을 깨는 일이 그렇게나 어렵다. 평소에는 자기주장을 못하더라도 적어도 소리 질러보기, 뭐라도 던져보기, 신체 에너지를 모아서 밀쳐내기 등의 행동을 한 번은 해볼 것을 권한다. 머릿속으로 아무리 시뮬레이션을 해봐도 실제로 해보지 않으면 막상 그 상황에 닥쳤을 때 쉽게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방어를 해야만 하는 상황들을 만들어내는 가해자와 사회 그 자체가 문제다. 피해자가 이에 대해 대처능력이 더 있었어야 했다고 질책하는 것도 전혀 도움이 안된다. 다만, 연습해보지 않으면 실제 상황에서 방어도 공격도 할 수 없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연습은 범죄적 상황에서부터 막연한 심리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필요하다.계약이란 두 당사자가 대등한 관계에서 체결하는 것이라는 전제가 있다. 계약 당사자인 한 인간이 주체적으로 자신이 구속될 규칙을 정한다는 뜻이다. 연애도 스스로 자신이 맺을 관계의 내용을 정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다. 여태까지 대부분의 연애에서 여성은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한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상대방에게 종속적인 존재가 되곤 했다. 연애를 계약으로 보자는 취지는 연애를 하는 사람들이 서로 동등한 주체가 되는 연애가 가능하며 이제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제안이기도 하다. 특히 여성들에게 자신이 주체가 되어 관계의 결정권을 가지는 연애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더불어 연애를 계약의 관점에서 체결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따져보는 일을 통해 여성을 물건처럼 여기고 나아가 범죄를 저지르기까지 하는 사람을 걸러낼 수 있는 팁을 제공하고 싶었다. 지면을 통해 전하는 이야기는 오늘로 마지막이지만 나머지 이야기는 얼마 전 출간된 를 통해 전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칼럼을 쓰면서 나 스스로도 연애에 대한 생각을 조금 더 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좋은 기회를 준 경향신문에 감사드린다.미학도로서 대학생활 내내 연극동아리 활동에 심취하며 살다가 로스쿨에 가 무대에 서는 배우 대신 법정에 서는 변호사가 됐다. 변호사가 된 첫해에 재단법인 진실의힘에서 을 함께 썼고, 현재는 법무법인 청맥에서 일하며 여성가족부 정책자문위원회 위원, 민변 사법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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