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김구와 그의 일행이 회의를 파탄시키고 퇴장하면 그때는 그들을 미국 간첩으로 몬다는 계획까지 수립했다.(『레베데프 비망록』, 1948년 4월 19일) '귀국 후 별별 짓을 다 하던 김구가… 이전에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던 것이 이제는 미 제국주의자들의 입에 먹히게 되니까 당황하여 평양에 오려 한다'(『조선노동당대회자료집』(1), 1980, 262쪽)는 것이 당시 북한 지도자들의 눈에 비친 김구의 모습이었다.
」 김구와 김규식이 주도한 남북협상 1948년, 해방된 지 3년이 지난 후였으니 한국인은 희망에 부풀어 있을 법도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유엔은 1948년 8월 15일에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한다는 일정에 따라 5월 10일을 총선거 실시일로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 남북한에 각기 다른 정부의 수립, 곧 분단을 확인하는 절차만이 남아 있었다. 더욱이 남한에서는 제주 4·3 사건이 최악의 사태로 치닫고 있어 좌우익 사이에는 적의가 팽배해 있었다.1948년 연초가 되자 남북협상 문제가 해방정국 의 새로운 이슈로 대두했다. 이 문제의 주도권을 잡은 사람은 김규식이었다. 그리고 김구가 가세했다. 이 일련의 움직임은 단정파의 승리가 가져온 충격에 대한 반사작용이었다. 1948년 2월 23~26일, 입법의원에서 단독 선거를 40대 0으로 가결했다.
단정과 분단이 현실로 다가옴으로써 김규식은 새로운 정치적 돌파구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분단이 가시화되는 시점에서 남북협상은 명분을 세우기에 좋은 계기가 됐다. 그 무렵 김구도 이승만에 대해 열패감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김구가 애초에 민족통일을 염원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도 없지만, 그는 이승만의 정치적 적수가 되지 못하고 끝내 이승만의 단정론에 말려들어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기된 김규식의 남북협상론은 김구의 정치적 입지를 만회하는 데 유리한 계기가 됐다. 2월 8일에 김구와 김규식이 유엔한국위원단의 메논 의장을 만나 남북 요인 회담을 제청했다는 사실이 정가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에서 두 사람은 서울 주재 소련 대표부를 경유해 북한의 김일성·김두봉에게 남북협상을 제의하는 편지를 발송했다. 희망의 불씨인지, 체념인지 국민의 반응은 착잡했다. 당시 김구가 더 적극적이었다. 그는 남조선 단독정부의 수립을 반대하는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해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고 선언했다.
김일성의 또 다른 계산 김구와 김규식의 편지를 받았을 때 상황은 복잡했지만, 김일성의 계산과 결심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1948년의 상황이 되면 남한의 우익 및 미군정이 단정의 수순을 밟고 있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북한은 이미 인민위원회 조직을 완성했고, 나름대로 단정 수립의 수순을 밟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자신이 먼저 단정을 추진했다는 역사의 비난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터에 받은 김구와 김규식의 제안이 그에게는 밑지는 거래가 아니었다. 김일성으로서는 남쪽이 먼저 주도권을 잡고 일을 추진함으로써 자신이 마치 끌려가는 듯한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남한의 제안을 못 들은 것으로 하고, 자신이 전혀 새롭게 남북 협상을 제의하는 형식을 취했다. 곧 김일성은 3월 15일에 6개 정당·사회 단체 명의로 남조선의 단정 반대 17개 정당·사회 단체가 4월 초 평양을 방문해 정치협상을 열자고 제안했다. 남한 대표로 김구·조소앙·김규식·홍명희·이극로·박헌영·허헌·김원봉·백남운·허성택 등 15명을 초청했다.
신복룡 김구 남북협상론 단정수립 김일성 신복룡의해방정국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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