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이 바뀔 때마다 작품은 살이 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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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작품은 시간이 흐르면 흩어지게 마련이다. 특히 좋은 작가일수록 더욱 그렇다. 생전에 명성을 누린 작가는 작가가 작품을 그리는 대로 팔려나가 막상 작가에게는 남아 있는 작품이 거의 없는 경우도 있다. 단색화와 같이 뒤늦게라도 인정받은 경우에는 작가가 소장하던 작품들이 전속 화랑을 통해 팔리면서 빠른 속도로 흩어진다. 작가나 작가의 유족이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시기별 주요 작품을 재단이나 미술관을 만들어서 소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주요 작품을 모두 소장하기도 어렵거니와 그나마 극소수의 예외 사례일 뿐이다. 몇 해 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한 학예사로부터 박래현 회고전을 기획하고 있다며 소장 작품의 대여가 가능한지 묻는 연락을 받은 적이 있다. 박래현은 한국화를 하며 전통화법에서 영감받은 독자적인 추상 작업으로 미술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이런 이유로 그 무렵 개인적으로 기획한 전시에서 박래현 작품 몇 점을 전시한 것을 보고 학예사가 연락한 것이다.필자뿐만 아니라 의외로 많은 전문가가 박래현을 높게 평가하며 그의 미술사적 중요성을 언급했다. 하지만 그동안 남편인 김기창의 명성에 가려져 막상 박래현에 대한 제대로 된 회고전이나 평가는 없었다. 뒤늦은 감은 있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은 전시로 박래현의 시기별 주요작들을 보여주며 작품세계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었다. 박래현 회고전은 미술관 입장에서도 구미가 당기는 전시였다. 하지만 제대로 회고전을 열려면 그만한 전시작품을 모을 수 있어야 한다. 박래현 작가가 사망한 뒤, 작가의 배우자인 김기창이 고향인 충북 청원군에 운보공방을 짓고 아내의 작품들을 모아 소중하게 관리했다고 전해진다. 김기창의 사망 이후 유작 관리를 맡은 유족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공방 건물을 비롯해 김기창의 작품과 박래현의 작품도 모두 팔려나갔다. 그래서 미술관 내부에서도 박래현 전시 기획안을 본 뒤 전시작품을 모을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고 한다.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박래현의 작품들은 유족의 품을 떠났지만 한 재벌에 일괄 매각돼 새로운 소장처에서 잘 관리되고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재벌이 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해체되면서 이 작품들도 다시 어딘가로 팔려나갔다. 학예사는 이후 이들 작품의 행방을 전혀 모르는 채 전시를 기획한 것이다. 그는 내게 전화한 것처럼 도록 등에 실린 작품의 행방을 한점 한점 수소문해서 찾고 있었다. 전시가 되려고 그랬는지 우연하게도 그즈음 필자는 수십 점 단위의 박래현 작품 소장처를 두 곳이나 알고 있었다. 그중 한 곳은 친한 친구에게 전해 들은 것이다. 박래현 작품 수십 점을 소장한 사람이 혹시 구매에 관심이 있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워낙 박래현의 수작들은 시장에서도 만나기가 힘들었기에 어떤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지 궁금하던 참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쪽에서는 오랫동안 거래해온 친한 화상 한 분이 박래현의 주요작들을 포함한 수십 점의 작품 소재를 파악해 소장자와 일괄 구매를 위한 계약 조건을 논의 중이었다.친구를 통해 박래현 작품의 소장처를 확인한 뒤 학예사에게 알려줬다. 또한 주요작들을 일괄 구매한 화상과 학예사가 따로 연락이 닿으면서 전시를 위한 작품들이 한순간에 모였다. 게다가 대표작을 일괄 구매한 화상이 또 다른 소장자와 연락이 닿아 또 한 무더기의 작품들을 구매했다. 한 재벌이 분할 매각한 작품들이 마치 퍼즐을 맞추듯 하나로 다시 모였다. 작품의 소재 파악이 안 된 상태에서 차마 엄두를 내지 못하던 박래현 전시는 이렇게 뜻있는 학예사의 열정과 과감한 도전으로 개최될 수 있었다.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서 종종 회자되는 좋은 전시로 기억되고 있다.전시가 열리고 2년여 흐른 뒤, 한 경매회사에 박래현 작품이 대거 출품돼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작품 다수가 고가에 팔려나갔다. 애써 박래현의 작품을 모았던 화상이 뜻있는 소장가나 미술관에 일괄 매각을 추진하다가 개인적 사정으로 단기적인 자금난에 몰리면서 부득이하게 경매로 처분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흩어졌던 작품들이 그 전시를 위해 잠시 다시 모이기라도 한 것처럼, 박래현의 작품은 한데 모이자마자 그렇게 다시 흩어졌다. 이와 비슷하게 동일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작품 수십 점이 한꺼번에 경매에 나온 경우가 있었다. 2013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추징금을 환수하기 위해 그의 아들이 소장하던 작품들을 압수해 경매로 처분했다. 소장품 수백 점 중에는 원로화가 김홍주의 작품이 40점 정도 포함돼 있었다. 작가가 프랑스 ‘카뉴 국제회화제’에 출품해 수상한 작품을 포함해 작가의 시기별 대표작이라 할 만한 작품들이 대거 망라돼 있었다.추징금 환수를 목적으로 했던 경매라 시작가가 매우 낮게 책정돼 있었고, 이런 이유로 당시 그의 작품들은 모두 새 주인을 찾아 팔려나갔다. 작가 또는 작가의 가족이 재단을 만들어 소장하던 작품도 결국은 흩어지고, 그 작품을 일괄 구매해 관리하던 재벌의 소장품도 흩어지고, 작가의 주요 작품을 시기별로 사면서 작가를 후원했던 대통령 집안의 소장품도 결국은 흩어진다. 아마 누군가가 다시 박래현 전시를 기획한다면 내가 아는 그 화상과 경매회사를 통해 팔려나간 작품의 소장자를 찾아 일일이 연락해야 할 것이다. 또 어디선가 김홍주의 회고전을 기획한다면 2013년 경매에서 작품을 사들인 소장자를 추적해 작품을 섭외해야 할 것이다. 작품은 남지만 소장자는 바뀐다. 그리고 소장자가 바뀔 때마다 이야기는 쌓이고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작품은 살이 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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