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산 저 멀리 저 언덕에는 무슨 꽃잎이 피어 있을까….” 어릴 적, 마을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였다. 나는 제목도 모른 채 경쾌한 선율을 따라 불렀다. 훗날 제목이 ‘소녀의 꿈’인 걸 알고 놀랐다. 노래를 흥얼거리던 당시, 나는 누나 옷을 줄여 입
“저 산 저 멀리 저 언덕에는 무슨 꽃잎이 피어 있을까….” 어릴 적, 마을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였다. 나는 제목도 모른 채 경쾌한 선율을 따라 불렀다. 훗날 제목이 ‘소녀의 꿈’인 걸 알고 놀랐다. 노래를 흥얼거리던 당시, 나는 누나 옷을 줄여 입어야 했다. 남자애들 색으로 염색했지만, 단추는 여자애들처럼 왼편에 달려 있었다. 남녀가 유별한데, 남이 알까 늘 걱정이었다.
그런데 ‘소녀의 꿈’을 따라 불렀다니, 소스라칠 일이다. 다행히 제목을 몰라 ‘소녀의 꿈’은 산 너머를 동경한 소년의 꿈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전남 진도의 씻김굿에 갔다. “저기 저 저 산 너머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순간 귀가 진돗개처럼 쫑긋해졌다. 오랫동안 내 속을 맴돈 가사와 흡사한 게 아닌가. 무녀는 이승을 하직한 망자를 꽃피는 세계로 천도하고 있었다. “영산강 사공아! 배 잠깐 건네다오.” 전라도의 씻김굿에서는 망자가 요단강 대신, 영산강을 건넜다. 청년이 된 소년은 ‘소녀의 꿈’ 첫 구절이 인연이 되어 굿판 속으로 빠져들었다. 시간이 더 흘러, ‘소녀의 꿈’이 흘러간 건전가요임을 알았다. ‘댄서의 순정’의 박신자가 1957년 취입했고, ‘홍콩 아가씨’의 금사향도 불렀다. 유튜브로 들어보니 2절과 3절의 가사가 생소했다. 3절에 “그림책 속의 왕자님…”도 나오니 확실히 소녀 취향이다. 어린 나는 앞뒤도 모르고 “저 산 저 멀리…” 대목만 따라부른 모양이었다. 중요한 단서는 작사 작곡이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로 유명한 손석우란 것이다. 그는 전남 장흥 출신이고, 목포상업학교를 나와, 기타리스트와 작곡가로 활동했다. 장흥이나 목포는 씻김굿이 성행했던 곳이니, 혹시 굿판의 소리가 작가에게 영감을 준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이 생겨났다.고향에 돌아와, 그토록 동경했던 산 너머를 보려고 병풍산을 향했다. 담양군과 장성군의 경계가 되기 위해 병풍처럼 길고 높게 둘러선 산이다. 어린 내 세상의 끝이었던 산에 오르니, 그저 산 너머 산이 있을 뿐이었다. 저쪽에서 출발해 병풍산을 올라왔다면, 이쪽에 펼쳐진 푸른 들과 살구꽃 핀 마을을 보았으리라. 무언가를 찾으러 떠난 이야기의 결론은 거의 같다. 그것은 산 너머가 아니라 이곳에 있다는 것이다. 작가들은 결론을 그렇게 정해 놓고, 떠나서 겪는 우여곡절을 파란만장하게 서술하는 것 같다. 춤판, 굿판, 소리판을 만들어 왔으니, 나도 여기까지 곡절이 많았다. 사람들은 나를 예술감독, 연출자, 단장 등으로 부른다. 겸손치 못한 말이지만, 내 겪은 험한 일에 비해 호칭이 평범하다. 대통령 앞에서도 공연했고, 궁궐 안 행사를 총괄하기도 했다. 또한 기생, 무당, 광대를 찾아 공연을 올렸다. 그러니 대전별감 정도가 적당해 보인다. 궁궐 안의 공연 행사를 주도한 이들인데, 궁궐 밖에서의 활약상이 신윤복의 ‘유곽쟁웅’에 그려져 있다. 기생을 사이에 둔 술손님의 싸움을 말리는 건장한 사내가 대전별감이다.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화류계를 통솔하려면 힘깨나 써야 했다. 왕조실록에서는 ‘양손에 각각 모래 50근을 매고 80보를 가는 자’를 뽑으라 했다. 물론 나는 그런 체격과 뚝심이 없다. 오로지 입심 하나로 버텨 온 일이다. 그래서 아침마다 혀로 윗몸 일으키기를 했고, ‘혀의 식스팩’이란 별명도 생겼다.담양은 인구 5만이 안 되는 작은 군이다. 인구절벽은 지역소멸이니, 노인들은 꿋꿋한 직립보행으로 시간과 싸운다. 이런 절실한 노력으로 담양은 손꼽히는 장수 고을이 되었다. 이 한적한 고을에서 사람이 제일 붐비는 곳은 군수실 앞이다. 새벽부터 결재 대기자가 꽉 들어찼다. 나는 담양군문화재단 대표이사로 틈을 밀고 들어가, “사또, 재단을 공격하는 두 부족이 있사옵니다. ‘예산 부족’과 ‘인원 부족’을 부디 물리쳐주소서.” 소리꾼처럼 청을 높였다. 담양은 면앙정, 송강정, 명옥헌, 소쇄원 등 수많은 정자와 원림이 솟아 있다. 이 땅에서 고을 전체가 통째로 융기한 ‘담양’이란 정자에, 사람들이 풍월을 쐬러 오게 해야 한다. 담양은 관광이 아닌, 풍류를 마케팅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래서 나의 귀향을, 옛 구절을 좇아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노라’ 운을 띄웠다. 그러나 임기 중에 계엄과 혼란이 있었다. 출향을 앞둔 글의 말미에 옛 표현 ‘역군은이샷다’를 쓰지 못하니 아쉽다.다시 고향 집을 찾았다. 돌아가신 할머니께 무사히 임기를 마쳤다고 고했다. 그리고 마당에 한참을 서 있었다. 나를 기다리던 살구나무도 늙어 죽었다. 이맘때면 가지마다 수만 송이가 등불을 켜 온 동네가 환했었다. 어떻게 입력하면, 인공지능이 그 시절을 영상으로 구현해줄까. ‘살구나무 아래로 친구들이 모여든다. 보리 베던 들판에서, 야외 전축에 맞춰 낫 들고 고고를 추던 풋내기들이다. 서울로 전학 간다고,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작별을 노래했다. 그리고 남녀공학으로 간다고, 환호성을 지르며 헹가래를 칠 때,’ 정지했으면 좋겠다. 노래하던 벗이여! 세월이 흘렀으니,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서울, 남녀공학, 학원 로맨스는커녕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 서울 김포공항 근처의 중학교는 남녀 구별이 엄격했다. 유일하게 시험 때만 커닝을 못 하게 남녀를 합반했다. 첫 시험을 여학생 교실에 가서 봤는데, 화장실이 몹시 급했다. 종이 울리자 뛰었는데, 아차! 소변기 없는 여학생 화장실이었다. 돌아서려는데, 왁자지껄 여학생들이 몰려왔다. 얼른 화장실 한 칸에 들어가, 급한 근심부터 풀었다. 그사이 다른 칸들은 덜컹덜컹 문을 여닫았다. 그러나 내 칸은 그렇지 못했다. 다급해진 여자애들이 쾅쾅 문을 두드리며 욕을 했다. 난 안에서 문고리를 쥐고, 금시초문의 쌍욕을 견뎠다. 그중 드센 애가 문을 타고 올라와 내다봤다. “악! 어떤 새끼 있어”, 나는 이제 죽은 거였다. 그때, 다행히, “땡!”하고, 시작종이 울렸다. 그때는 ‘헝그리 정신’의 시대로 권투 중계가 많았다. 상대편 선수가 다운 직전인데 “땡!”하고 공이 울리면, “네! 저 선수, 공이 살렸군요”하는 해설자의 단골 멘트가 있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화장실의 악몽에 시달렸다. 권투 챔피언처럼 국위선양을 한 선수가 김포공항에 입국하면, 우리는 김포가도에 나가 손을 흔들었다.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에게 휘파람을 불려고, 그 시간을 기다렸다. 나는 내 얼굴을 목격한 그 여학생이 “이 새끼가 그 새끼야!” 고함칠까 봐, 내내 두려웠다. 고향 집을 나와 고샅을 내려오니, 구십 노인네의 오래된 문짝이 있다. 비바람을 견뎌왔으니, 필시 거문고를 만들어야 할 문짝이다. 조선시대 문신 김일손은 거문고 만들 나무를 찾다가 성문 밖에 사는 노파의 100년 된 문짝을 발견한다. 이보다 잘 마른 오동나무가 어디 있을까. 1490년경 문짝의 판자를 얻어 ‘문비금’을 만들었다. 악기에 옹이구멍과 못 자국이 남아있다. 타협 없이 강직한 사관이었던 김일손은 후일 무오사화로 희생된다. 문비금은 김일손의 호 탁영을 붙여 ‘탁영금’으로 부른다.우리 고샅 노인네의 문짝은 소나무다. 그래서 소나무의 절개를 새긴, 줄이 없는 무현금을 만들 생각이다. 중국의 시인 도연명은 무현금을 마련해 두고, 어루만지며 마음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문짝은 내 어릴 적에도 이미 낡아 있었다. 김일 선수의 박치기를 흉내 내며 들이받아봐서 안다. 역시 100년이 넘는 문짝인데, 만약 쪼개서 불을 땐다면 낭패다. 마을 이장을 통해 저 문짝의 안부를 확인하다가 때가 되면 입수할 것이다. 898번 지방도로로 병풍산을 넘어 1번 국도를 탔다. 여전히 “저 산 저 멀리 저 언덕에는 무슨 꽃잎이 피어 있을까” 대목만 흥얼거린다. ‘소녀의 꿈’이 ‘소년의 한 줄’이 된 것이다. 먼 길을 권유하는 문장, ‘풍류’라 부르는 역마살을 부추기는 노래가 되었다. 여기저기 꽃이 터지는 날, ‘출향우서’, 고향을 떠나며 우연히 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소룡의 ‘당산대형’을 보고 ‘무’를 알았고, 탈춤과 명무전을 통해 ‘무’에 빠졌고, 서울의 굿을 발굴하면서 ‘무’를 만났다. 기생, 무당, 광대, 한량을 찾아 ‘남무’, ‘여무’, ‘전무후무’를 올렸다. 마침내 ‘무’를 깨닫고, 사무친 이야기를 담은 ‘노름마치’를 출간했다. 국가유산진흥원 이사장을 역임하고, 담양군문화재단 대표이사로 일했다. 현재 ‘사서삼담’, 4일은 서울 3일은 담양에 있으며, 무대와 마당 사이의 문화판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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