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생적으로 뭉친 시민의 힘, 인천 배다리에서 본 것 인천_배다리 드라마_도깨비 산업도로_배다리를_지키는_인천시민모임 영화학교_창영학교_인천성냥공장 경인선_기공지 이영천 기자
마을이 정겹다. 낮은 집이며 구불구불 좁은 골목이 연출하는 분위기가 아늑하다. 배다리란 이름은 더 그렇다. 주교라거나 선교라는 일제가 강요한 지명으로 창씨개명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잘 지켜낸 이름에 모든 게 담겨있다. 곧고 질긴 생명력을 발산하는 공간 정체성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다. 나라와 땅은 물론 모든 걸 앗기어도 혼과 얼만은 내어줄 수 없다는 굳은 저항정신과 신념이 엿보인다.
교육과 의료를 앞세운 개신교 진입 루트가 인천이었다. 미국 감리회 소속 아펜젤러가 1885년 동인천에 내리교회를 설립한다. 이 교회 소속 존스 목사가 1892년 세운 자립예배당이 영화학당이다. 한국 최초 서구식 초등 교육 기관인 '영화학교' 탄생 배경이다. 1910년 배다리로 이전하면서 지은 문화재인 교사는 2023년 현재 수리 중이다.배다리는 조선인이 자립 교육에 가장 먼저 눈뜬 곳이기도 하다. 1904년 객주이자 선박회사를 운영하던 정재홍이, 쇠뿔고개에 조선 아동만을 위한 교육기관 천기의숙을 설립한다. 1907년 4월 인천공립보통학교로 문을 연 '창영학교' 전신이다. 인천 3.1운동이 창영학교 학생 주도로 이뤄진 까닭이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얼과 정신을 지켜내려 싸운 배다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 교사도 1922년 조선인 모금으로 지어졌다.미국 북장로회 소속 알렌이 갑신정변 후 제중원을 설립한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9일 임금인상 50%와 일본인 감독 배척을 요구하며 다시 파업에 나선다. 일제는 인근 공업지대로 파업이 확산할까 두려워 강경 진압에 나선다. 배후 조종 명분으로 10여 명이 극심한 고초를 겪고 파업은 동력을 잃고 만다. 이 파업은 이후 인천 지역 노동운동과 항일운동 씨앗이 된다.배다리에 헌책방이 생긴 건 해방 이후다. 자긍심과 얼을 바탕으로 형성된 교육기반이 헌책방 탄생 배경이다. 전쟁을 치르고 물자가 귀해지면서 헌책 수요가 급증한다. 집에 있던 헌책이 쏟아져 나온다. 폐허가 된 거리에 모여든 손수레와 노점상에서 이를 팔기 시작한다. 1950년대를 지나며 헌책방이 호황을 구가한다. 한때 40곳이 넘는 헌책방이 성황을 이뤘다.배다리 헌책방 거리는 인천을 대표하는 배움터였다. 이곳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헌책방 거리는 지식에 대한 열망과 앞날을 가늠하는 지표였다. 학생들 덕분에 공간이 활기를 띠었고, 헌책방으로 인해 배다리가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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