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2월 18일의 14대 대선은 민주당 김대중(DJ)과 민주자유당 김영삼(YS)이 각축을 벌이고, 통일국민당 정주영이 변수로 작용하는 구도였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불거진 95년 10월 27일 중국 베이징에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를 수행한 임채정 의원은 ‘20억원’이라고 했다) 동독인은 불행한 독일 통일의 교훈 심란한 기분을 전환하고 인생을 되돌아보고 싶었다. 김일성 사망에 설익은 통일 낙관론 남북 관계가 급진전하면서 김영삼·김일성의 남북 정상회담이 7월 25~27일로 정해졌다.
1992년 12월 18일의 14대 대선은 민주당 김대중과 민주자유당 김영삼이 각축을 벌이고, 통일국민당 정주영이 변수로 작용하는 구도였다. YS와 초박빙의 경쟁이었지만 나는 승리를 자신했다.안기부는 “북한에서 남파된 거물급 간첩 10여 명이 10여년간 암약하며 사회 각계각층 400여 명을 조직원으로 포섭해 대남 적화공작을 해 왔다”고 발표했다. ‘남로당 사건 이후 최대 규모의 간첩사건’이라 불리며 정국을 요동치게 했다.북풍과 공안정국을 일으켜 여당 후보인 YS에게 유리하도록 판을 흔들려는 불순한 의도였다. 대선이 끝나자 요란하던 간첩단 사건은 흐지부지 자취를 감춰버렸다. 나에게 색깔을 덧씌우기 위해 기획된 ‘북풍몰이’라는 방증이었다.정계 은퇴 선언 후 영국 체류 시절인 1993년 3월 찾아온 가족·지인과 함께 찍은 기념 사진. 왼쪽부터 신용석 민주당 지구당위원장, 김대성 비서실 차장, DJ, 장남 김홍일씨, 탤런트 정한용씨.
그 소식을 듣고 나는 “이제 YS는 끝났다”고 예단했다. 그런데 돌아가는 게 이상했다. 많은 언론은 “우리가 남이가” 등 지역주의를 부추긴 핵심 문제는 쏙 빼놓은 채 “왜 도청을 했냐”며 정주영 측에게 불법의 책임을 전가했다.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4년 6월 방북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평양 대동강변에서 북한 김일성과 대화하고 있다. [중앙포토] 대선 과정에서 고백할 게 하나 있다. 당시 나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돈을 받은 적이 있다. 김중권 청와대 정무수석이 가지고 왔다. 김 수석은 “노 대통령이 다른 후보에게도 인사를 다 했다”고 전했다.
93년 1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으로 떠나 연구활동을 했다. 독일 통일 직후였기에 베를린을 방문해 학자들과 통독 과정과 한반도 통일 방향에 대해 논의할 기회가 있었다. 기억에 남는 대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어째서 몰랐습니까?”같은 민족이니 통일만 하면 다 잘 될 줄 알았다. 그러나 통일 후 동독인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동독 시절에는 공부도, 집도, 전기·수도도 다 공짜였다. 일자리가 없이 놀아도 월급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