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은 모르는 건강의 비밀- '의료는 얼마나 중요할까' ⑤] 좋은 사회를 위한 의료의 진짜 역할
'의료는 얼마나 중요할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이 연재는 사람들의 직관과 배치되는 불편한 사실 하나를 드러내려 했다. 의료가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람의 생사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의료대란으로 병원이 멈춘 짧은 시기에도, 한 세대에 걸쳐 사회의 기대수명이 변화하는 과정을 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의료에 큰 기대를 건다.
왜일까. 그 이유는 의료가 단순히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을 넘어, 사회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응하는 하나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의료는 단순한 응급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만든 해법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결정적 공백이 있다. 바로 '중요한 문제'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의료와 어떤 방식으로 만나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지금 이 사회에 가장 절박한 문제가 무엇인지, 의료가 어디서부터 응답해야 하는지 말하는 일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기후위기, 지역소멸, 돌봄 공백 같은 문제를 위기로 지칭하지만, 그 영향은 대개 숫자나 추상적 담론이 아니라 일상의 균열로 다가온다. 기후위기는 대표적인 예다. 그저 먼 미래의 환경 문제가 아니다. 부산 어민들은 고등어 그물에 점점 더 많이 끼어드는 해파리와 열대 부유물 속에서 생업의 위기를 체감하고 있다. 인건비는 오르는데 해파리를 일일이 걸러내야 하니 노동 강도는 두 배가 된다. 기후위기라는 거대한 담론이 어민들의 손끝과 일터에서 실감되는 것처럼, 의료 역시 삶 속의 위기로 다가온다. 건강 돌봄의 위기는 어느 날 병원이 무너지는 방식으로 오지 않는다. 인구가 줄어든 대도시 한복판에 빈집이 늘고, 아플 때 안부를 물어줄 이웃이 사라지고, 병원에 함께 가 줄 사람이 없어 결국 치료를 포기하는 노인이 있다. 이처럼 사회의 '큰 문제'는 언제나 구호보다 삶 속에서 먼저 다가온다. 의료 역시, 바로 그런 일상의 균열 속에서 가장 절실한 역할을 요구받는다. 재난 불평등, 도심 공동화, 돌봄 위기. 이처럼 복잡하고 구조적인 문제를 단정적으로 비판하고, 누군가를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하면 말싸움에서는 이길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문제를 '어떻게 함께 해결할 것인가'이다. 기술은 실험실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늘 공동의 문제에 부딪히며, 그 안에서 해법을 만들어 왔다. 코로나19에는 백신으로, 독재에는 민주주의로, 고령화에는 돌봄 시스템으로 응답해 왔다. 의료도 다르지 않다. 의료는 생물학적 질병만을 다루는 기술이 아니다. 예컨대, 소아청소년과 의사는 학대가 의심되는 아이를 발견했을 때, 의학적으로 꼭 필요하지 않더라도 입원을 결정할 수 있다. 아이가 집 대신 머무를 안전한 장소를 찾을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다. 의료는 이렇게 현실에서, 더 나은 선택지를 고민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또 다른 예로 일본에서는 겨울철 빈곤층 노인에게 '의학적으로는 불필요'하더라도 병원 입원을 권하기도 한다. 추운 집에서 혼자 지내다 숨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의료의 공간과 권위는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둠으로써 생명을 살리는 방패가 된다.그러나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한국 의료는 앞의 방향과 거리가 멀다. 한국 사회는 쉬지 않고 달릴 것을 강요한다. 그러니 의료도 그에 맞춰 '빨리 낫게 해주는 것'이 중심이 된다. 아파도 쉬지 못하는 사회, 노동자들은 아무리 아파도 다음 날 출근을 위해 병원을 찾고, 병원은 기꺼이 '수액'을 내준다. 의료만 특별히 비틀린 걸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이상해 보이는 이런 의료도 한국 사회의 요구에 의료가 스스로를 맞춘 결과다. 아파도 쉴 수 없고, 서로를 돌볼 여유가 없는 사회에서 의료는 속도와 효율만을 추구하는 산업이 되기 마련이다. 병원 곳곳에 의학적으로는 효능이 없어 보험이 되지 않는 '영양수액' 광고 포스터가 붙고, 환자들에게 이를 권하는 풍조 역시 사회적 산물이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공백은 치명적이다. 대형 병원의 자기공명영상진단 장비는 밤낮없이 돌아가지만, 농촌의 할머니는 요실금 때문에 한밤중에 시린 무릎을 끌고 화장실을 다녀야 한다. 그러나 이런 삶을 돌봐줄 의료는 없다. 의료를 상품으로 보는 상황은 이런 불균형을 더 심화시켰다. 대형 병원의 한쪽에서는 최첨단 장비를 자랑하면서, 다른 병동에서는 단순한 욕창 때문에 고통받는 노인이 방치된다. 동네 의원은 감기 처방으로 바쁜 와중에, 만성질환자가 최대한 약을 조금만 먹을 수 있도록 처방전을 조정하는 일은 흔히 방치된다. 검진센터는 무증상자에게 고가 검진을 권하지만, 비싼 검진을 받지 않는 초기 치매 환자에게는 해 줄 것이 없다. 증상과 필요를 입력하면 의사만큼이나 정확한 진단과 처방을 내어놓는 인공지능의 등장에 대한 기대도 비슷한 맥락을 담고 있다. 의료가 적절한 시기 병원에 스스로 나타나 자신의 증상과 건강의 문제를 충실하게 말하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알맞은 처방을 판매하는 일에 불과하다면, 의사보다 AI가 더 친절하고 유능할지 모른다.의료는 생명을 살리는 위대한 도구다. 하지만 이 성취에 취해, 의료인도, 사회도 의료가 '고통을 줄이는 기술'이라는 본질을 잊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의료라고 하면 기계로 가득한 병원과 바쁘게 뛰는 의사, 의학 드라마의 장면을 떠올린다. AI가 의료를 혁신할 것이라는 전망도, 결국 또 하나의 '기술 중심 해법'일 뿐이다. 문제는 의료를 어디에 쓰고자 하는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게 할 것인가다. '의료'라는 단어를 다시 보자. 의는 앓는 사람을 술로 치료하는 것을, 료는 병에 걸려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의 병을 태워버린다는 뜻이다. 술이든, 불이든, 고통을 덜고 사람을 살리는 것, 그것이 의료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약이나 검사가 아니다. 서로의 삶을 돌보는 의료, 충분한 설명과 공감으로 환자가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의료,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의료다. '의료는 얼마나 중요할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이 연재는 이제 마지막에 다다랐다. 우리는 의료가 죽고 사는 문제를 좌우한다는 환상을 벗기고, 그 너머의 역할을 조명하려 했다. 한국 사람들이 누리게 된 긴 기대수명을 설명한 지난 글은 이렇게 끝났다. 의료는 사람들의 생사를 결정하는 데에는 예상보다 역할이 크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큰 기대를 받는다. 그렇다면"의료는 얼마나 중요할까?"라는 이 시리즈의 질문 역시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의료는 어떻게 한국 사회의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그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 우리가 말하고자 한 결론은 단순하다. 의료는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만든 기술이다. 그리고 그 기술이 어디를 향할지는, 특정 전문가나 제도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선택과 책임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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