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떠난 여성 정치인의 '대반전'... 여의도 뒤집어놓은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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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어른] 여성의 정치세력화에 기여한 박영숙

이희호와 김대중은 1988년 4·26 총선을 앞두고 도피 생활을 했다. 고명섭 논설위원의 은"1988년 3월 17일부터 31일 사이에 쓴 이희호의 일지는 이동 경로를 이렇게 밝혀놓았다"라며"목동-김 차장 댁-목동-밤 12시 넘어 동교동 귀가-목동-필동-목동-동교동 귀가"라는 문구를 보여준다. 그달 30일, 평화민주당의 국회의원 후보자 명단이 발표됐다. 이희호 부부가 피신 생활을 한 것은 공천 문제 때문이다.

위 평전에 따르면, 이희호는"공천이 가장 힘든 일이었지요","하루 종일 집안이 북새통이었어요"라며"막무가내로 찾아오는 사람들, 공천에서 탈락한 뒤 찾아와서 항의하는 사람들로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어요. 어떤 사람들은 행패를 부리기도 하고요"라고 회고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는 시민혁명에 굴복한 세력이 승리를 거둔 어이없는 선거다. 김영삼과 단일화하지 못해 노태우에게 어부지리를 안긴 김대중은 이로 인해 큰 비판을 받았다. 제1권은 문익환 목사가 김대중을 찾아가"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여성운동가 이태영이 그 앞에 주저앉아"이제 다 망했다"라고 탄식한 일을 들려준다. 김대중은"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라며"너무도 후회스럽다"고 회고했다.그래서 김대중은 뼈를 깎는 심정으로 4·26 공천에 임했고 이로 인해 도피 생활을 했다. 은"김대중은 4·26 총선에 사활을 걸었다"라며"3월 17일 평화민주당 총재직을 내놓고 재야 입당파인 박영숙에게 총재대행을 맡겼다"라고 한 뒤"박영숙을 전국구 1번으로 올리고 김대중 자신은 전국구 11번으로 등록했다"라고 기술한다. 김대중은 민주화세력을 살리고 당을 살리기 위해 비장의 한 수를 꺼내놓았다. 그것은 여성운동가 박영숙을 앞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자신은 당선 가능성이 모호한 11번으로 내려갔다. 이 시도는 대성공을 거뒀다. 사상 초유의 여소야대 국면이 조성되면서 평민당은 전체 299석 중의 70석을 차지한 제2당이 됐다. 이때 김대중과 함께 역사적 승리를 일궈낸 박영숙은 평민당 총재대행을 지내고 국회의원을 지낸 뒤 대중의 시야에서 희미해졌다. 한동안 여성 정치인의 대표적 인물로 비쳤던 그는 1992년 제14대 총선에 출마하지 않았다. 그런데 언론보도에 자주 등장한 그 5~6년만으로는 그가 남긴 역사적 의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역사적 관점에서 그가 좀 더 중요했던 기간은 그 5~6년 이후다. 정치권을 떠난 뒤 이룩한 성과는 여의도 정치가 품어내기 힘든 역사적인 것이었다. 박영숙은 만주사변 이듬해에 평양에서 태어났다. 딸 셋과 아들 셋이 있는 가정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먼저 밥을 퍼주는 전통적인 여성이 아니었다. 그와의 인터뷰에 기초한 2010년 제529호 기사 '영원한 현역의 끝없는 허스토리'에 따르면, 어머니의 그런 모습은 그의 의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어린 시절 그의 모친은 성별에 관계없이 나이순대로 밥을 퍼주었다 한다. 배식의 평등은 고사하고, 남녀가 겸상도 하지 않던 봉건시대였다. 모친의 이 같은 배려 속에 그는 자연스럽게 주체적인 인격체로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홉 살 때인 1941년에 아버지를 잃었다. 그 뒤 할머니가 사는 만주로 이주했다가 1945년 해방 이후에 평양으로 귀환해 정의여자중학교에 입학했다. 월남한 것은 1947년이다. 광주에서 전남여자중·고등학교를 다녔고, 1951년에 이화여대 영문과에 입학해 5년 뒤 졸업했다. YWCA 대학생부 간사로 활동한 그는 30대 초반인 1960년대 초중반부터 상근 총무 위치에서 이 기구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이 시기까지 기독교 여성운동에 전념했던 그가 여타 분야의 운동으로 영역을 넓힌 계기는 35세 때인 1967년에 안병무 교수와 결혼한 일이다. 위 는 이렇게 설명한다. "민중신학의 창시자인 안병무 한신대 교수는 기성 교회는 물론이고 독재정치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고, 결국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으로 구속되며 재야의 중심 인물로 떠올랐다. 그 역시 YWCA와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서 소비자운동·환경운동·여성운동·노동운동을 주도하며 운동의 지평을 확대시켜 나갔다." 사회운동의 지평을 확대하던 박영숙이 한국 정치의 한가운데에 서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86년 6월 6일의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더불어 6월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수행한 이 사건 당시, 여성단체연합 성고문대책위원장이 된 54세의 박영숙은 전두환 정권의 만행을 규탄하는 대열의 선두로 나섰다. 1986년 7월 29일 자 11면 하단은 박영숙이 주최한 '성고문 규탄 기도회'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 경찰 15개 중대 2천여 명이 서울 중구 정동의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 주변을 통제한 그달 27일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날 낮 1시쯤부터 성공회 주변에 모이기 시작한 박영숙 NCC 여성위 위원장 등 기독단체 관계자와 김수한·이중재·노승환 신민당 부총재, 박찬종·이철 의원 등 20여 명의 신민당 의원을 포함한 2백여 명은 성공회 주변에서 저지 경찰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 성고문 사건을 계기로 정치적 주목을 받은 박영숙은 제13대 국회에 들어가 여성 관련 법제에 심혈을 기울였다. 위 는"의원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그동안 생각했던 법률의 마련과 통과에 매달렸다"라며"가족법과 남녀고용평등법·탁아법·윤락행위방지법 등이 그가 제·개정한 주요 법률"이라고 소개한다.그의 이룩한 정치적 성과는 여의도를 떠난 뒤가 훨씬 컸다. 71세 때인 2003년에 출범시킨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는 여성들을 개별적으로 정치권에 진입시키는 차원을 뛰어넘어 여성들이 정치세력화를 이루도록 만드는 운동이었다. 이는 여성운동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새로운 실험이었다. 뜻있는 개혁가가 국회에 들어갔다가 4년 뒤 쓸쓸히 퇴장하는 모습은 우리 눈에 익숙하다. 박영숙의 실험은 개혁적인 여성 정치가를 용해시키는 기성 시스템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는 의회에 진출한 여성 정치인이 생물학적 여성 정치인으로 남지 않고 여성의 권익을 지속적으로 강력하게 대변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17대 총선을 앞두고 박영숙이 이춘호 한국여성유권자연맹 회장 및 윤후정 이화학당 이사장을 비롯한 여성 인사 70여 명과 함께 만든 맑은넷은 각 정당에 여성 국회의원 후보를 추천하는 방식으로"여성 100인 국회 보내기"를 추진했다. 여성들의 조직화된 정치적 에너지를 활용하는 이 운동은 여성의 의회 진출에 크게 기여했다. 2010년 제30호에 게재된 김은경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의 논문 '여성대표성 확보의 기제로서 할당제 효과'에 따르면, 17대 총선에 출마한 여성 후보자 전체의 당선률이 24.8%인 데 비해 맑은넷 추천 후보자의 당선률은 47.8%였다. 맑은넷은 46명을 추천해 22명을 당선시켰다. 맑은넷의 추천을 받고 여의도에 간 의원들은 여성 관련 입법을 대표 발의하는 데서도 두드러진 활약상을 펼쳤다. 위 논문은"17대의 경우 맑은넷 후보가 비맑은넷 후보보다 더 많은 여성 관련 법률을 대표 발의하였다"라고 알려준다. 논문에 따르면. 여성의 권익을 옹호하는 면에서는 맑은넷 출신 의원들이 민주노동당 의원들보다 적극적이었다."민주노동당 여성 의원의 경우, 전체 대표발의 건수는 압도적으로 많으나 여성 관련 법률안의 수가 적었다"라며 민노당 여성 의원들은 여성 관련 입법보다 노동 관계 법안에 훨씬 적극적이었다고 논문은 말한다. 박영숙의 맑은넷 운동은 일반적인 진보정당의 여성운동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진보든 보수든 남성 중심의 정당들이 담아내기 힘든 것을 박영숙과 그 동지들은 해냈다. 2010년에 발행된 위 는 맑은넷 운동을 이렇게 평한다. "각 당에 여성 후보를 추천하며 17대, 18대 연속 여성 국회의원 비율이 10%를 넘는 성과를 이루어냈다. 진수희·이혜훈·김금래·전현희·김진애 의원, 이경숙·장향숙·이계경·손봉숙·김희정·심상정 전 의원 등이 이때 추천을 받은 전·현직 여성 국회의원들이다." 국회와 대통령이 국민을 대리하는 대의제 시스템에서는 대의기구가 전체 국민의 이해관계를 골고루 대변해야 정치가 안정된다. 숫자로만 보면 결코 소수가 아닌데도 정치적으로 소수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이를테면 여성·노동자·농민·장애인·성소수자·이주노동자·고령자·아동·청소년 등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면 정치불안정이 고조된다. 박영숙은 그런 과제를 여성정치 분야에서 상당 부분 달성했다. #박영숙 #여성운동 #여성정치 #민주주의 #여성권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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